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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여행 김환기 생가

기사승인 2019.05.06  17: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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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여행의 백미는 안좌도의 김환기 생가다. 김환기 화백에 대한 그림과 사랑에 있어서 김향안 부인을 빼놓을 수 없다. 김환기의 그림은 열정의 사랑이었고 그 완성은 김향안이었다.

이번 김환기 생가는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삶과 점으로 수놓은 미술 작품을 생각하며 한국 현대 미술의 화풍과 작품세계를 김향안에 대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김환기 화백은 우리나라 서양화가의 1세대로 한국적 서정주의를 서구 모더니즘에 접목해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평소 미술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으로 맛보는 김환기 화백의 생가 투어는 인문학적 소양을 높임과 아울러 미술을 더욱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신안 여행의 백미를 김환기 생가라 한 이유다.

신안 여행에서 만난 김환기 생가를 둘러보며 한국의 서양화가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이며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했던 김환기를 그리워한다. 김환기는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이미지가 걸러진 절제된 조형성과 한국적 시정신을 바탕으로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구현해냈다.

그는 이곳에서 1913년 태어났다. 이곳은 전남 신안군 안좌도다. 남도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지만 곧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33년 도쿄 일본 대학 예술 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1936년 졸업하고, 이어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동료들과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나 백만회 같은 혁신적인 그룹을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와 자유 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에는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했다. 우리나라의 선구적인 추상 화가로서의 그의 초기 역할이다.

▲김환기 생가가 있는 이곳은 안좌도 읍동리 955번지다. 신안 안좌도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그가 유년시절 살았던 집이 기와집으로 잘 단장돼 있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그룹전을 열었다. 그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인 미와 풍류의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의 멋에 깊이 심취, 도자기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됐다.

이러한 변화는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파리 시기에도 지속됐다. 그의 한국적인 것에 대한 탐닉은 파리에서의 제작 기간 동안 그 농도를 더했다. 그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지 않았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을 기본으로 한 추상 정물화 작업을 선보였고 이는 후에 고국산천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을 띠게 됐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고, 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색이기도 했다.

1963년 10월 김환기는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회화 부문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뉴욕으로 가 11년에 걸친 뉴욕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김환기 생가의 마을 안좌도 읍동리를 걷는다. 봄을 함께 걷는듯한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사람을 품은 어쩌면 평생 사랑을 품은 따뜻함이 그의 그림에 남아있다.

그가 뉴욕에 정착한 1963년 무렵에 미국 화단의 주도적 경향은 색면 회화였지만 한편으로는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여러 새로운 실험적 미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뉴욕 시기 작품은 크게 형상이 남아 있는 1970년 이전과 점과 선만의 완전한 추상으로 화면 전체가 변하는 1970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0년에서 그가 타계한 1974년까지는 그의 활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여기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담고 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해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누구보다 서양미술을 풍부하게 경험했지만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양의 전통을 계승하고 예술을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 시대의 문인 화가였다. 비록 자연의 외형은 사라졌으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71년과 1972년의 그의 작품에서는 점화의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활형의 곡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1973년에는 활형과 직선들이 교차되거나 어우러져 사용됐다. 이러한 요소는 무한으로 열린 공간의 확장을 상징하고 광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200호 상당의 대작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한 시기의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갈무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적 풍류와 정취를 지닌 인정 많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온몸으로 예술을 살다가 이렇게 61세로 생을 마감했다.

▲신안 안좌도 김환기 생가 마을에도 빈집이 있다. 누군가 살다가 떠나버린 집은 휑하다. 행복한 기억과 가족의 사랑을 남기고 빈집은 또 이곳에 이야기꽃을 피울 새로운 사람을 기다린다.

그의 곁을 평생 지킨 부인은 김향안이다. 그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천재 시인이 자 소설가였던 이상의 부인이었고 김환기 화백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여인이다. 김향안을 보고 사랑에 빠진 김환기를 위해 그의 이름조차 버리며 김향안으로 산 이 여인은 누구인가?

김향안은 경기 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시절, 오빠의 소개로 시인 이상을 만났다.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라는 지극히 시인스러운 이상의 고백으로 두 사람은 사랑을 시작했고 멀쩡한 여대생이 그 길로 짐을 싸 들고 나와 1936년 결혼했다.

하지만, 이상은 결혼 4개월 만에 시인으로써의 도약을 위해 동경으로 떠났고 1937년 4월, 폐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동경으로 달려가 임종을 지키고 이상의 유골을 한국으로 들고 온 김향안은 한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향안은 무명의 서양화가 김환기를 소개받는다.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다 딸을 셋이나 둔 남자였기에 김환기는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못하고 편지로 서신을 교환하며 마음을 표현한다. 김향안의 부모는 자식이 있는 남자와 개가 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사랑은 믿음이고,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라며 1944년, 김환기와 재혼했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과 연을 끊으며 남편의 성을 따라 김향안으로 개명한다. 대단한 사랑이다. 그 용기 있는 사랑이 절절하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1955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김향안은 파리 소르본과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이화여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김환기도 아내를 따라 파리에 갔고, 두 사람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서양의 미술 세계를 경험한 것은 김환기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74년 김환기 화백의 죽음 이후 김향안은 남편의 작품을 모으고 돌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친다. 1994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인 사비로 만든 최초의 미술관인 환기미술관을 부암동 산기슭에 열었다. 미술관 설계는 당시 보스턴에서 활동하던 세계적 건축가 우규승이 맡았고, 퐁피두 미술관 관장이었던 도미니크 보조도 참여했다.

요즘은 환기미술관이 있는 서촌과 부암동에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면서 환기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2004년 2월 29일,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꼭 30년 만에 김향안 여사도 뉴욕에서 별세했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웨스트체스터 공동묘지, 그토록 묻히고 싶어 했던 남편의 묘지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웠다. 예술가의 아내로서만이 아니라 수필 '파리와 뉴욕에 살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등을 발간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스스로도 예술가였던 그녀의 인생은 한국 예술사에서 두 천재의 아내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향안이 애정을 기울였던 환기미술관이 있는 서촌과 부암동에는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면서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늘 신안 안좌도에서 김환기 생가를 둘러보고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한다. 그의 그림이 그려진 벽화도 보고 봄꽃들의 향기에 사랑이 뭘까? 새삼 생각한다. 온 힘을 다해 사랑을 한 김환기와 김향안의 사랑, 그것이 바로 열정이고 예술이다.    

Tip

전남 신안 김환기 생가 찾아가는 길 주소: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김환기길 38-1

엄금희 기자 ekh@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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