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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체험기

기사승인 2019.04.28  21: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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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이정민 칼럼은 '크루즈 체험기'로 대신합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인지라 크루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랑의 크루즈다.
캐롤 마리넬리의 책 ‘크루즈는 사랑을 싣고’ 또는 물에 흘러 다니는 모든 배에는 왠지 모르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사랑의 유람선’ 이라는 말은 있어도 ‘우정의 유람선’ 혹은 ‘효도의 유람선’ 같은 말은 없지 않나?

감히 유람선과 크루즈를 비교하는 것이 크루즈를 만든 이들에 대한 모욕이지만 땅위에서 바라보는 배는 다 같은 배다. 크루즈 여행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냥 모두 배다.

동양적 가치관으로만 따지면 배는 유람이며 한가로움의 상징이다. 뱃놀이가 대표적이다. 크루즈 여행 역시 노년의 부부가 여유롭게 인생 말년을 즐기는 일종의 ‘레크레이션’이다. 크루즈 여행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었다. 제 아무리 크고 넓은 크루즈선이라도 어찌됐든 갇힌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다섯날을 자고 여섯날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수중 교도소가 따로 없는 셈이다.

기항지 관광...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관광을 마치고 다시 수감소로 들어가는 기분일 터 크루즈 여행에 대한 선입관은 지우지 못했다. 크루즈 여행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많아야 300~400명이 들어가는 비행기와는 달리 한 번에 기본 1000명 이상. 그 많은 동승객들이 한꺼번에 크루즈에 탑승하려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천공항의 단계별 검색대 통과는 애들 장난이다. 그나마 기자라는 신분으로 조금 일찍 들어가 선내 취재의 기회를 주니 불편함으로 인한 짜증스러움은 사라지지만 뒤로 늘어선 탑승객의 줄을 보니 어림잡아 200미터 이상이다. 그렇게 “크루즈는 인간을 싣고” 가 시작된다.

평균 나이 60이다. 딱 봐도 60이면 가장 어리다. 주최측의 말로는 88세가 가장 노령이라는데 그렇다면 70세가 평균이다. 이른바 ‘해방둥이’ 분들이다. 자식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여성이 남성다우며 남성이 여성다워진 분들이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그 분들이다. 기초질서에 대한 개념은 없고 이리 툭 저리 툭 마치 내가 재미난 인형인 듯 치고 지나간다. 이미 지하철에서 단련된 몸이라 그러려니하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탑승 첫날, 첫 단체 식사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전국 팔도의 사투리가 한데 섞여 국적을 알 수 없는 언어로 들린다. 동지애 그리고 가족애는 왜 그리 강한지 그 복잡한 가운데서도 그들은 반드시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어야 하며 동지들끼리 줄을 서야 한다. 약속도 안했으면서 같은 식구라는 이유로 새치기는 기본이다.
그 많은 인원이 식사를 마쳤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망망대해'다. 속도는 약 10~20km로 보인다. 배의 진동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내는 분잡해진다.

마치 해외여행을 처음하는 이들처럼 다소 촌스러워 보이던 동승객 어르신들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외국인 한명 타지 않은 크루즈지만 다소곳한 한복을 입으신 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역시 한복의 빛깔은 곱다. 물었다. 왜 한복이냐고. 선상 파티를 즐기려한단다. 알고보니 크루즈 다경험자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왠만한 해외여행은 다 경험하신 분들이다. 마치 동네 시장보러 나온 듯 한 복장의 그들은 밤 시간이 되자 주말 결혼식장 인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맞춤 정장으로 변신해 선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무질서 해 보이던 흐름도 제법 질서가 보인다.

그런 사이 갇혀있다는 강박관념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크루즈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고작 첫 날 저녁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국에 도착할 때 까지 저 복잡 다양한 캐리어를 다시 추스릴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살 것 많은 첫 번째 일본 기항지 투어는 한결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제대로 된 쇼핑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무너졌다. 근거없는 크루즈 여행에 대한 반감 그리고 6일 동안 사육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크루즈다. 나에겐 마치 보약과도 같은 커피는 이탈리아산으로 그 맛과 향이 깊고 진하다. 커피 한잔을 주문하니 바로 옆 피아노에선 바이올린 2중주가 시작된다. 생김새는 러시아 여성인데 사용 언어는 이탈리아어인지 체코어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된다. 하지만 연주곡은 알아 듣겠다. 무슨 곡인지.

앞에 시가룸이 보인다. 한국말로 하면 흡연실이다. 초절정 럭셔리 아름다운 흡연실이다. 아랍의 거대 부자가 사용할 만한 수준의 럭셔리 흡연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시계 초침이 빨리 느껴진다. 여행 종료 시점을 계산할 만큼 크루즈 탑승 6시간 도 채 안 돼 완전한 적응 상태로 첫날밤을 보낸다.

크루즈 선내에서의 조식은 바다 위 조식이다. 첫 번째 기항지 밖 모습이 보이지만 바다 위 조식은 맞다. 수천명이 함께 하는 조식이지만 첫날과는 달리 제법 질서가 잡혔다. 역시 사람은 오래 봐야 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나니 어르신들의 질서의식은 죽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간혹 인정해 줄만한 수준의 새치기는 보이지만 그래도 소득 3만불 국가의 시민답다.

기항지 창밖으로 우리를 모시러 수십대의 버스가 대기중이다. 기분 괜찮다. 간단히 배낭만 둘러매고 선내를 빠져 나가니 일본이다. 밤새 먹고 잠만 잤을 뿐인데 외국이다. 입국 심사도 어느정도 다 되어있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의 백미라는 것인가! 왠만한 일들은 크루즈 스탭들이 미리 손을 봐두었으니 세상 편한 해외여행이라는 소문이 그냥 말이 아닌 게 분명하다.

멀리 크루즈가 보인다. 기항지 투어에서의 쇼핑은 부담없이 한 짐이다. 멋들어지게 정박해 있는 거대한 배의 동그란 창문이 보인다. 내 방인가? 분명 육지에서 바라 본 거대한 배는 이제 더 이상 배가 아니다. 내 집 같다. 들어가면 내 옷이 있고 내 물건이 있다. 내 물건 있는 곳이 집 아니었던가!

배에 오르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이제는 아름다워 보인다. 더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환송해주는 현지 공연단이다. 일본스럽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이 보인다. 아기자기한 자기네 전통 물건들을 가져와 경제 활동도 한다. 잘만 고르면 ‘득템’도 가능하다.

같은 버스에 올랐던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7080 세대가 어쩌고 저쩌고... 난데없이 내뱉는 말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예의상 적절한 응대를 한다. 그로부터 몇 분 후 그 남자는 그냥 남자가 아니었다. 나의 청춘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대중가요를 부른 주인공이다. 스타였다.

그날밤 그는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무대에 올랐다. 다음날 역시 같은 버스를 타고 기항지 투어에 나섰다. 한때 너무 동경했던 가수지만 함께 투어하니 동네 형님이다.

다시 밤.
선내 분위기는 더욱 달아오른다. 그 형님 보다 더 대스타가 내 옆에 앉아 커피를 즐긴다. 한때 대한민국 가요계를 좌지우지했던 그다. 크루즈 선상 공연으로 탑승했다지만 그래도 스타는 스타다.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 또 다른 기항지다. 배가 좋다. 선내에서 할 일이 너무 많다. 볼거리 먹거리도 넘친다. 와이파이가 안 된다면 아쉽겠지만 공해상을 건너는 망망대해에서도 잘된다.

평소 집밖을 나돌아다니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크루즈 투어는 천국이자 보금자리다.

객실을 나와 각 층을 돌아다니면 항상 시끌벅적하다. 그런 와중에도 카페 한 켠에서는 고급 클래식 연주가 계속된다. 해방둥이 승객들이 ‘뽕짝’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장르별 선호경향이 뚜렷할 뿐이다.
 
왠만한 클래식곡을 줄줄 꿰고 있다. 심지어 따라 부르기 까지 한다. ‘오 솔레 미오’는 나만 외우는 줄 알았다. 구경꾼 모두 외우고 있다. 해방둥이의 품격이자 수준이다. 이제 대한민국 여행자들도 크루즈 여행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수준인 것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이다.

3일차가 지나고 4일차가 지나니 이젠 선내 왠만한 시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승객들 역시 품위가 더해진다. 각자에 맞는 선내 프로그램을 찾아 따로 움직인다. 그래서 인지 특별히 붐비는 곳 없이 평온한 분위기다.

배 가장 위쪽인 갑판에서는 연인인 듯 부부인 듯 남녀서로 정답다.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 마련된 탁구대에서 시끌벅적 즐긴다. 또 다른 한쪽, 재떨이가 놓인 탁자에서는 카지노 게임에서 연승을 한 이들, 연패를 한 이들이 서로 뒤엉켜 실패와 성공의 이유에 대해 근거없는 논리로 분석을 이어간다.

면세점은 전원 여성들이다. 아주 가끔 발길을 멈추는 남자들은 입구 옆에 놓인 손목시계 정도에만 아주 잠깐 시선을 맡긴다. 5초가 채 안 된다.

일정 내내 4시간에 한번 꼴로 들린 카페. 이제 이곳에서 일하는 스탭은 근처에만 가도 나를 알아보고 커피 드립을 시작한다. 진하게 마시는 나의 취향까지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 내 자리로 가져다 주겠단다. 가서 기다리란다. 이미 서로 간에 정(情)이 들어 버렸다.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4일째를 맞이하며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크루즈 선내에서의 삶이다. 서로 즐기는 프로그램과 장소만 다를 뿐.

크루즈는 작은 지구 같다. 각자의 모양대로 즐기며 시간을 보내며 먹으며 마시며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캐롤 마리넬리’는 분명 크루즈 여행을 해 본 선생이시다.

이정민 기자 ljm@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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